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시다 요시오 (문단 편집) === 한신 감독 1기 === 선수생활을 접은 후 1974년까지 [[후지TV]], [[간사이 테레비]] 해설가로 활동했으며, 1975년 [[카네다 마사야스]]의 후임으로 [[한신 타이거스]] 감독에 취임했다.[* 이 당시 [[닛폰햄 파이터즈]]에서 [[나카니시 후토시]] 감독과의 다소 불편한 관계로 인하여 자유계약으로 풀린 [[장훈(야구선수)|장훈]]이 요시다에게 한신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넌지시 밝혔고 요시다가 단박에 OK하여 장훈이 오사카에 집까지 마련했지만, 뒤늦게 영입 경쟁에 뛰어든 [[요미우리 자이언츠]]에 장훈을 내줘야 했다.] 감독으로선 특이하게도 보통 팀의 주전 선수들이 다는 등번호 1번을 달았다. 이해 홈런왕 수상으로 [[오 사다하루]]의 연속 홈런왕 기록을 저지한 팀의 주포 [[타부치 코이치]] 등을 앞세워 시즌 중반까지 [[히로시마 도요 카프]], [[주니치 드래곤즈]]와 [[센트럴리그]] 우승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시즌 막판에 추락하면서 3위로 마감했다. 취임 당시 "달리는 야구"를 표방한 요시다였지만 정작 팀 도루가 [[양대리그]]제 도입 이래 팀 최저 기록인 31개에 그치며 스피드를 전혀 보여주지 못한 것도 원인. 감독 첫 시즌을 마치고 팀의 주축 [[투수]]였던 [[에나츠 유타카]]를 [[난카이 호크스]]로 보내는 등[* 이 트레이드의 배경엔 요시다와 에나츠가 여러 차례 의견 차이로 대립하면서 사이가 벌어졌다는 속 사정도 있다.] 대형 트레이드를 감행하며 팀의 체질개선을 꾀했고 다음 해인 1976년, 신예 슬러거 [[카케후 마사유키]]와 에나츠와의 트레이드로 영입한 [[에모토 타케노리]] 등 투타에서 맹활약하는 에이스 선수들을 앞세워 이해 숙적 [[요미우리 자이언츠]]와의 치열한 우승 경쟁 끝에 불과 2게임차로 [[센트럴리그]] 2위에 머물렀지만 그래도 승률 .615를 찍으며 꽤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. 그러나 이듬해인 1977년엔 주포 [[타부치 코이치]]의 부진과 투수진 붕괴로 팀 성적이 승률 .466으로 떨어지면서 순위도 리그 4위로 하락했고, 이로 인해 요시다는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. 당시 승률 .466은 한신 사상 최악의 승률이었다. 다만 바로 1년 만인 1978년 한신이 '''승률 .339'''로 작년보다 더 비참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구단 사상 최초로 [[센트럴리그]] 최하위로 추락하는 굴욕을 맛보는 바람에 최저 승률 타이틀은 어찌저찌 떼게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